남새밭을 일구며

 

 

 

흐린 날엔 남새밭에 나가 푸성귀를 가꾸고

수수밭 건너 초가 뒤로 지는 노을이 곱다

저린 팔목에 부서진 꿈도

사람이 사는 섧고 깊은 속까지도

눈비에 젖어 흐르다 보면

못 이룬 이승의 이쁘고 착한 것들이야

뻗신 황매화 뿌리마다 단단히 박아두고

곳곳에서 막히는 내 힘에 부친 발길은

어둠이 걷히기 전 돌아갈 일이다

마침내 어둠 가득한 날

몸에 익은 사립문안에 나 들어갈 수 없고

아득한 공중을 헤매 돌다

앞마당에 잡초 무성할 때에 다시 살아있으리라

두고 온 것들도 두런두런 되돌아와

호미도 곡괭이도 다시 기운을 얻고

길섶마다 들망초 흐드러지게 피어나리라

뿌리마다 내 꿈들도 생기 있는 얼굴로 굵게 익어가고

익히다 모자라면 또다시 누워 남새밭이 될 것이다

밤이면 성근 수수깡 위로 별이 되고 슬픔이 되어

내 묻힌 풀밭에 땅만 보고 섰을 풀줄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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