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길 - 송인준 시집

지우고 싶은 것들

TiGeR.K 2017. 8. 12. 12:11

지우고 싶은 것들

 

 

내가 딛고선 가랑잎과

안일의 둥지를 지우고 와출하였다

골목 어귀에서 마주치는 찬바람을 지우고

풀잎들의 헬쑥한 얼굴도 지우면서

쳐다본 하늘엔 비가 내렸다

둥지마다 빗물이 고여도

외로운 사람 하나 울지 않았다

홀로 타는 가로등에

지우개를 대고 밀고 밀어도

젖은 불빛은 지워지질 않고

가로등만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차갑고 좁은 가슴들도 지우고

골목을 비틀거리던 그림자들도

말끔히 지웠다

폐병 앓는 내 입술을 막으며

붉게 얼룩진 손수건도 지우고

학창시절 강다리 침목의 結氷을 건너던

두려움도 지웠다

어린 날 삘기 뽑아 씹으며

헛배를 달래던 뒷산의 솔바람도

그 보릿고개도

텅 빈 뜨락의 외로움도 지우고

내 머리 위의 까만 하늘도

하나씩 지워 나갔다

어둠이 한 꺼풀씩 지워질수록

내가 지운 절망의 언어들이 살아나고

둥지가 보이고 둥지 속의

헛된 욕망도 드러났다

그 하늘 어둠이 벗겨질수록 가로등은 빛나고

어지러운 내 발자국도 선연하다

드러 눕는 풀잎과 허물어지는 둥지와

그 어느 것 하나도 지우지 못하는

고무지우개를 들고

나는 도깨비처럼 어른거리는

기억들을 지우고 싶었다